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오파트라 7세 (문단 편집) === 카이사르와의 관계 ===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의 내전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 참고로 이는 전설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동안 융단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열사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융단 속에 숨었으면 나왔을 때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렇기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들 '설마 미쳤다고 저 안에 숨었겠냐'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일화를 다룬 옛날 서양 그림들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나체로 그린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감상자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지만 화가들은 열기 때문에 옷을 다 벗은 거라고 핑계를 대기는 했다. 뭐 어차피 카이사르를 유혹하러 간 거니 나체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긴 하겠지만 말이다.][* 이 시기를 다룬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는 현실성을 위해서인지 새벽에 궁으로 들어간다. 실제 양탄자에 들어가 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고.] 그리고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 야사가 드라마틱하긴 하나, 사실 정치적으로 따져도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하는 결정을 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서 부왕의 유언대로 공동 통치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고 또 신용하기 어렵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 측은 펠루시온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2만 명과 갤리선 72척을 활용해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로마에서의 원군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했고, 아르시노에 4세는 포로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었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 풀 네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써 [[로마]]에 방문하기도 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듯 하며 카이사르는 코끼리 40마리를 대동하고 [[캄피돌리오 언덕|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내려왔다 한다. 자국의 최고 권력자와 내연 관계라는 타국의 미인 여왕의 방문에 로마 시민들은 흥미를 보인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때 카이사르는 이미 12년 전 혼인한 정실부인 [[칼푸르니아]]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화는 가부장제가 강한 편인 데다 카이사르는 온 로마가 알아주는 유부녀 킬러(...)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클레오파트라와 연애 좀 해도 '아, 카이사르 또 저러네' 정도의 가십거리 이상으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키케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맹국인 이집트의 국왕이 로마 최고권력자의 손님으로 온 것이니 명분은 충분했다. 키케로에게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키케로가 쓸데없이 로마와 이집트의 관계를 훼방놓는 말을 한 거라고 해석하기도 할 정도. 카이사르 자신도 공사 구분에는 꽤나 철저해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본처를 버리거나 큰 정치적 악수를 둔 것은 없었기에[*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죽음으로써 로마의 내전도 끝났고, 이집트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평정해 확실하게 로마 세력권에 두고, 폼페이우스 살해범의 세력과는 관련이 없는 클레오파트라를 옹립함으로써 나름 정의도 세우는 등 정치적 업적도 얻었으니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님도 보고 뽕도 딴 셈. 게다가 죽을 때까지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을 로마 정계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안 해 별달리 반발도 안 샀다.] 그냥 사람들이 좀 수군거리는 정도에서 그쳤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클레오파트라의 남자가 된 [[안토니우스]]도 정적으로부터 비슷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본처 옥타비아를 버리고 정치적으로도 잘못된 선택을 연이어 하는 바람에 여론이 등을 돌린 것은 물론이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해 몰락하고 만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으나[* 카이사르 사후 유산을 기대했던 듯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유언장에 단 한 마디도 적어놓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는 급 실망했다고 한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돈이 없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기대한 건 아니었을 테니 사실상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인정하는 내용이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물론 노회한 정치가인 카이사르가 공사도 구별하지 못하고 로마 정계에 초위험인물인 클레오파트라를 끌어들일 일따윈 없었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가 이미 마음을 정해 유언장에 적어 둔 후계자는 아직 젊지만 그렇다고 주변 인물들에게 마구 휘둘리지 않을 만큼은 나이를 먹었고 그만한 자질도 있는 양자 옥타비아누스였다.] 이집트에서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서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또한 로마 내의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